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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상 약 48,000종의 거미는 모두 육식성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곤충은 물론 개구리, 물고기, 심지어 새나 쥐 같은 척추동물까지 사냥하는 거미들 사이에서 단 한 종만이 예외적인 식성을 보입니다. 바로 바기라 키플링지입니다. 고생대 대분기 이후 성공적으로 진화해 온 거미 중 유일하게 채식을 선택한 이 독특한 종은 생태학자들에게 진화의 놀라운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카시아 벨트체를 주식으로 삼은 유일한 거미
2001년 미국 브랜다이스 대학교의 생물학자 에릭 올슨은 코스타리카 열대우림에서 연구 중 놀라운 발견을 하게 됩니다. 그의 조교가 아카시아 나무에서 채집한 깡충거미가 개미의 철통 같은 호위를 뚫고 그곳에 서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카시아와 포세도미르멕스 속 개미들은 전형적인 공생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아카시아는 개미에게 보금자리를 제공하고, 잎 끝에서 단백질과 당, 지방이 함유된 벨트체라는 영양체를 생산해 먹이로 제공합니다. 개미는 그 대가로 아카시아를 순찰하며 다른 곤충들로부터 식물을 보호하는 역할을 수행하죠.
올슨 박사는 처음에는 우연히 다른 나무에서 떨어진 개체라고 생각했지만, 반복적인 채집과 직접 관찰을 통해 이 거미가 아카시아의 벨트체를 먹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이 거미는 이미 19세기말에 발견되어 소설 정글북의 흑표범 바기라의 이름을 따 바기라 키플링지라는 학명을 부여받은 종이었습니다. 2007년 멕시코에서도 같은 종이 발견되면서 이들의 채식 습성이 단순한 예외가 아니라 진화적으로 확립된 생존 전략임이 명확해졌습니다.
멕시코와 코스타리카 개체군의 식단 분석 결과는 흥미롭습니다. 멕시코 개체군은 식단의 91%를 벨트체에 의존하는 반면, 코스타리카 개체군은 60%만을 벨트체로 채웁니다. 나머지는 개미 유충, 꿀, 작은 파리, 드물게는 자신보다 작은 깡충거미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일부 거미들이 간혹 꽃가루나 꿀을 먹는 경우는 있었지만, 식물성 먹이를 주식으로 하는 초식성 거미는 바기라 키플링지가 최초입니다. 이는 거미의 진화사에서 전례 없는 식성 전환을 의미하며, 생태적 지위 분화의 극단적인 사례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개미 공격을 피하는 교묘한 생존전략
바기라 키플링지가 개미의 공격을 피하면서 벨트체를 확보하는 방식은 정교한 행동 전략의 결과입니다. 이 거미는 개미집 주변이지만 벨트체가 만들어지지 않는 오래된 잎에 보금자리를 만듭니다. 개미 입장에서는 먹이가 없는 곳이므로 순찰 빈도가 낮은 안전지대인 셈입니다. 벨트체를 훔칠 때는 바기라라는 이름에 걸맞게 재빠르게 움직입니다. 개미의 움직임을 세심하게 관찰하며 기회를 엿보다가 개미가 사라진 틈을 타 눈 깜짝할 새 벨트체를 낚아채 달아나는 방식입니다.
더욱 대담한 것은 개미의 유충이나 알까지 훔치는 행동입니다. 관찰 영상에서 확인되듯 거미는 꽤 과감하게 개미로부터 애벌레를 훔쳐 도망치기도 합니다. 올슨 박사는 이러한 생활 방식이 생존 경쟁의 결과로 진화했을 것이라고 분석합니다. 거미줄을 치는 대신 직접 사냥감을 찾아 나서는 전략, 그리고 움직이는 사냥감 대신 움직이지 않으면서도 1년 내내 생산되는 아카시아의 벨트체를 먹이원으로 삼음으로써 다른 거미와의 먹이 경쟁을 완전히 피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다만 아카시아의 벨트체는 당과 단백질이 풍부하긴 하지만 80%가 거미류가 소화하기 힘든 섬유질이라는 영양학적 한계가 있습니다. 이는 육식성 먹이에 비해 질적으로 낮은 영양원임을 의미합니다. 그럼에도 바기라 키플링지가 이 먹이원에 의존할 수 있는 이유는 아직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장내 세균의 도움을 받는 특별한 소화 능력을 가졌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또는 육식성 먹이보다 훨씬 자주 먹을 수 있기 때문에 질보다는 양으로 승부하는 전략일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생존전략은 다른 거미들이 점유하지 않은 생태적 지위를 개척함으로써 종의 생존 가능성을 높인 진화적 성공 사례로 평가됩니다.
준사회성 거미로서의 진화 가능성
바기라 키플링지의 또 다른 독특한 특징은 사회성입니다. 일반적으로 독립생활을 하는 여타 거미들과 달리 이 종은 한 아카시아에 수백 마리가 모여 살고 있습니다. 2007년 빌라노바 대학교의 크리스토퍼 미아는 이 거미가 개미처럼 유기적으로 협업하지는 않지만, 수백 마리가 한 장소에 집단 서식한다는 사실, 여러 개체가 새끼 거미들을 키우는 둥지에서 함께 생활한다는 사실, 그리고 암컷이 수컷보다 개체 수가 두 배나 많다는 사실을 근거로 이들이 준사회적 거미일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현재 대표적인 사회적 거미로는 스테고푸스 두미콜라가 있습니다. 이들은 한 거미줄에 집단을 이뤄 살며 사회성 곤충처럼 대부분 암컷으로 구성되어 있고, 그중 40%가 번식을 담당하며 나머지 60%는 자식을 낳지 않고 새끼만 돌보는 역할 분담을 보입니다. 바기라 키플링지는 암컷의 개체 수 비율이 더 많고 한 서식지에 모여 산다는 점에서 스테고푸스 거미처럼 완전한 사회적 거미로 변화해 가는 과도기적 단계일 수 있다는 추측이 제기됩니다.
이러한 준사회성은 채식이라는 독특한 먹이 전략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벨트체라는 안정적이고 풍부한 먹이원이 한 장소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여러 개체가 모여 살 수 있는 환경적 조건이 형성된 것입니다. 육식성 거미들이 먹이 경쟁 때문에 독립적으로 살 수밖에 없는 것과 대조적입니다. 바기라 키플링지의 사례는 먹이 전략의 변화가 사회 구조의 진화로까지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생태학적 증거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거미에 대한 상식을 완전히 뒤집은 바기라 키플링지의 이야기는 진화의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채식이라는 독특한 먹이 선택, 개미의 공격을 피하는 정교한 전략, 그리고 준사회성으로의 진화 가능성까지, 이 작은 거미는 생태계의 틈새를 개척하며 성공적으로 생존하고 있습니다. 뻔한 듯 뻔하지 않은 자연의 묘미, 그것이 바로 바기라 키플링지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진화의 서사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