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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사바나를 달리는 얼룩말의 검은색과 흰색 줄무늬는 자연계에서 가장 독특한 패턴 중 하나입니다. 산얼룩말, 사바나얼룩말, 그레비얼룩말 등 3종의 얼룩말은 모두 이 특징적인 무늬를 지니고 있으며, 오랜 기간 생물학자들을 괴롭혀온 진화의 수수께끼였습니다. 초원 환경과 어울리지 않는 이 눈에 띄는 무늬가 왜 자연선택되었는지에 대해 과학자들은 다양한 가설을 제시해 왔습니다.

얼룩말
얼룩말

위장효과 가설의 등장과 한계

다윈과 동시대를 살았던 진화학자 월리스는 얼룩말의 줄무늬가 포식자들을 혼란시키는 위장 효과를 낸다고 주장했습니다. 사자 같은 포식자들은 색약이라 초원의 풀과 얼룩말의 색깔을 잘 구분하지 못하고, 따라서 풀숲 사이에 있으면 얼룩말은 포식자의 시선을 따돌릴 수 있다는 설명이었습니다. 이 위장 효과 가설은 얼룩말의 줄무늬를 설명하는 가장 전통적인 가설로 자리 잡았고, 이후 많은 과학자들이 이 이론에 살을 붙여나갔습니다.
특히 주목받은 것은 착시 위장 효과 가설이었습니다. 얼룩말이 여러 마리 모였을 때 일종의 대즐 위장 같은 효과를 낼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대즐 위장은 세계 1차 대전 때 사용된 위장 전술로 군함 표면에 무늬를 그려 넣어 적군을 혼란시키는 방식이었습니다. 위장은 단순히 눈에 띄지 않게 숨는 것뿐만 아니라, 동물의 이동 경로와 속도 등을 헷갈리게 만드는 효과도 있습니다. 2013년 마틴 모아 교수와 요한 제허 교수는 얼룩말들이 이동할 때 생기는 패턴을 분석해 얼마나 혼란 요소들이 많은지 확인하는 연구를 진행했습니다. 실험 결과 여러 마리 얼룩말들이 움직일 때 예상치 못한 패턴들이 훨씬 많아지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요한 젠쿱 교수는 얼룩말의 패턴이 마치 회전하는 이발소의 사인볼이나 자동차 바퀴가 일정 속도에 다다르면 뒤로 도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는 것과 비슷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이 위장효과 가설에는 치명적인 허점이 존재했습니다. 얼룩말은 여전히 사자의 주요 먹잇감이라는 사실입니다. 만약 줄무늬가 정말로 효과적인 위장용으로 진화했다면, 얼룩말은 다른 초식 동물들보다 포식자에게 덜 잡아먹혀야 합니다. 하지만 실제 생태계에서 얼룩말이 두드러질 정도로 덜 잡아먹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아시아에도 호랑이 같은 포식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줄무늬를 지닌 말이 출현하지 않았다는 점도 이 가설의 설득력을 약화시켰습니다. 이러한 모순점들은 과학자들로 하여금 얼룩말 무늬의 진화적 의미를 다른 방향에서 탐구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체온조절 가설의 야심 찬 도전과 실패

위장효과 가설의 한계가 드러나자, UCLA의 브렌다 리스 박사는 2015년 논문을 통해 체온조절이라는 발칙한 가설을 제시했습니다. 그녀의 주장에 따르면 얼룩말의 무늬 중 검은 부분은 더 빠르게 뜨거워져 이곳의 공기는 상승 기류가 강하고, 흰 부분은 상대적으로 온도가 낮아 이곳에선 하강 기류가 생기면서 얼룩말 피부 표면에선 공기 회오리가 발생해 더운 곳에서도 피부의 온도를 낮춰 준다는 것이었습니다. 브렌다 리스 박사는 조사 결과 줄무늬가 없는 포유류보다 줄무늬가 있는 포유류의 피부 온도가 3도 낮았다고 발표했습니다.
이 체온조절 가설은 얼핏 과학적으로 타당해 보였고, 아프리카의 뜨거운 사바나 환경을 고려할 때 충분히 설득력 있는 진화적 이점처럼 보였습니다. 검은색과 흰색의 온도 차이로 인한 대류 현상이 자연적인 냉각 시스템으로 작용한다는 아이디어는 물리학적 원리에도 부합했습니다. 그러나 이 주장도 곧 많은 반대에 부딪히게 되었습니다. 가장 결정적인 반론은 실제 얼룩말의 행동 패턴에서 나왔습니다. 만약 줄무늬가 냉각 효과 때문에 진화했다면 얼룩말들은 땡볕에서도 풀을 뜯어먹을 수 있어야 하는데, 대부분의 말들은 너무 더우면 그냥 그늘로 이동합니다.
2018년 갑으로 호 바쓰 박사는 얼룩말의 줄무늬가 냉각용이 아니라는 사실을 실험으로 증명해 논문으로 발표했습니다. 그는 배럴 통에 줄무늬 가죽과 그렇지 않은 가죽들을 씌워 놓고 온도가 어떻게 변하는지 측정했습니다. 결과는 명확했습니다. 직사광선이 아니면 검은색과 흰색 무늬 사이에서는 온도 차가 없고 결국 대류도 일어나지 않아 냉각 효과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실험은 체온조절 가설의 핵심 논리를 정면으로 반박했습니다. 실제 자연환경에서 얼룩말이 경험하는 대부분의 상황에서 줄무늬가 주는 냉각 효과는 미미하거나 거의 존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로써 체온조절 가설은 설득력을 잃게 되었고, 과학자들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흡혈파리 가설의 놀라운 증거들

위장효과도 애매하고 체온조절도 애매한 상황에서, 최근 가장 설득력을 얻고 있는 주장은 놀랍게도 파리 가설입니다. 얼룩말의 줄무늬가 흡혈 파리에게 물어 뜯기는 것을 피하기 위해 진화한 형질이라는 것입니다. 흡혈 파리는 동물의 피를 빨아먹는 곤충을 총칭하는 말로, 그 피해 규모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소 한 마리가 흡혈 파리 떼로부터 빨리는 피해량이 최대 500cc에 달했다는 연구 결과가 있을 정도입니다. 사실 이 흡혈 파리 가설은 1930년 헤리스 박사가 처음 주장했으나 당시에는 주목받지 못했고, 최근 들어 이 가설을 뒷받침하는 연구들이 속속 나오면서 재조명받고 있습니다.
2012년 헝가리의 아다무스 박사는 획기적인 실험을 진행했습니다. 실제 말 크기의 모형에 검은색, 흰색, 갈색 그리고 얼룩 줄무늬 모양까지 각각 그려놓고 끈끈이를 붙여 말 모형에 들러붙는 흡혈 파리의 수를 조사했습니다. 그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검은색 모형에 562마리, 갈색 모형에 334마리, 흰색에 225마리가 붙었지만, 얼룩말의 줄무늬 모형에는 훨씬 적은 수의 파리만 붙어 있었습니다. 이어서 미국 캘리포니아대 팀 카로 교수는 두 차례에 걸쳐 얼룩말의 줄무늬와 흡혈 파리의 회피에 대한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그의 연구에서 빨간색 선으로 표시된 흡혈 파리의 이동 동선을 분석한 결과, 얼룩말보다 갈색 말에 훨씬 더 많이 붙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팀 카로 교수는 더 직접적인 실험을 설계했습니다. 총 7마리의 말에 각각 검은색, 하얀색, 얼룩무늬 세 개의 옷을 입힌 후 파리의 접근 정도를 조사했습니다. 연구 결과는 명확했습니다. 얼룩무늬 옷을 입힌 말에는 첼 파리가 거의 접근을 못했습니다. 더 놀라운 발견은 얼룩무늬 옷을 입혔어도 얼룩무늬가 없는 얼굴 부분에는 첼 파리가 잔뜩 몰렸다는 사실입니다. 하우 교수는 첼 파리가 얼룩무늬 근처로만 오면 비틀거리고 방향을 180도 돌려 반대로 날아가는 등 제대로 비행을 못한다고 밝혔습니다. 현재 많은 생물학자들은 이 첼 파리 가설의 손을 들어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얼룩말만 이런 진화를 겪었을까요? 팀 카로 박사는 얼룩말의 털에 주목했습니다. 얼룩말을 비롯해 누, 오릭스, 야생 당나귀 등의 털의 길이를 조사한 결과, 얼룩말의 털의 길이가 확연히 짧았습니다. 얼룩말은 다른 동물들보다 털이 짧아 첼 파리에게 좀 더 물어 뜯기기 쉬웠고, 결국 그 대체재로 흡혈 파리를 혼란시킬 수 있는 줄무늬를 갖는 방향으로 진화했다는 설명입니다. 다만 왜 얼룩말이 흡혈 파리에게 유독 취약한지에 대한 정확한 이유는 아직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얼룩말의 줄무늬 하나에도 이렇게나 치열한 과학자들의 공방전이 있었다는 사실은 진화생물학의 복잡성을 보여줍니다. 위장효과 가설의 치명적 허점, 체온조절 가설의 실험적 반박, 그리고 흡혈파리 가설의 설득력 있는 증거들은 과학적 방법론이 어떻게 진실에 접근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진화된 얼룩말의 조상에게 직접 물어볼 수는 없지만, 과학자들의 끊임없는 탐구를 통해 우리는 자연선택의 비밀에 한 걸음씩 다가가고 있습니다.


[출처]
과학은 세상을 보는 창: https://www.youtube.com/watch?v=Jwf9zp_uis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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