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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인도양 심해 카이레이 열수 분출공에서 발견된 비늘발달팽이는 지구상 유일하게 철로 구성된 외피 구조를 지닌 생명체입니다. 수심 2,700m, 270 기압, 섭씨 400도의 블랙 스모커가 분출되는 극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이 달팽이는 단순한 생존을 넘어 진화의 경이로움을 보여줍니다. 5억 4천만 년 전 캄브리아기부터 이어진 유전자를 간직한 채, 세균과의 공생으로 먹이 없이도 생명을 유지하는 비늘발달팽이의 비밀을 탐구합니다.

비늘발달팽이
비늘발달팽이

철갑옷 구조: 3층 방어 시스템과 나노 기술의 결정체

비늘발달팽이의 가장 놀라운 특징은 바로 철 성분으로 구성된 철갑옷입니다. 2003년 스웨덴 자연사 박물관의 안드레스 워렌 교수팀이 밝혀낸 바에 따르면, 이 철갑옷은 정교한 3층 구조로 설계되어 있습니다. 바깥층은 황화철 결정이 박힌 철질 방어층으로 외부 충격을 1차적으로 차단합니다. 중간층은 충격을 흡수하는 두꺼운 유기물층으로, 압력을 받으면 형태가 변하면서 에너지를 흡수하고 분산시키는 핵심 역할을 수행합니다. 안쪽 층은 일반 달팽이처럼 탄산칼슘층으로 구성되어 기본적인 골격을 유지합니다.
2010년 MIT의 크리스틴 오르티즈 교수팀은 나노 인덴터라는 다이아몬드 팁 장비와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통해 비늘발달팽이 껍데기의 경도와 강성을 측정했습니다. 실험 결과는 충격적이었습니다. 게의 집게발이 며칠 동안 계속 압박해도 껍데기가 부서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강도는 중간층의 에너지 흡수 및 분산 능력 덕분이었습니다. 발 부분 역시 수백 개의 철 비늘이 기와처럼 겹겹이 덮여 있어 전신이 방어력으로 무장된 상태입니다.
비늘발달팽이가 철갑옷을 만드는 과정은 더욱 경이롭습니다. 먼저 주변 열수의 황화수소로부터 비늘 내부에 황을 축적합니다. 그런 다음 바닷물에 있는 철 이온을 흡수하고, 철과 황을 반응시켜 철황 화합물 나노 입자를 형성합니다. 인간이 철을 가공하려면 용광로에서 1,500도 이상 가열해야 하지만, 비늘발달팽이는 자기 몸 안에서 최소한의 에너지만 써서 나노 크기의 철황 화합물을 제작해 냅니다. 이러한 생체 나노 기술은 MIT와 미국방부가 신소재 방탄복 개발에 착수할 정도로 혁신적입니다.
흥미롭게도 비늘발달팽이는 서식지마다 색이 다릅니다. 철 성분이 풍부한 카이레이 지역의 비늘발달팽이는 검은색을 띠며, 철 성분이 부족한 솔리테어 지역의 비늘발달팽이는 흰색을 띱니다. 철 성분이 중간 정도인 롱치 지역의 비늘발달팽이는 황금색을 띱니다. 이는 환경에 따라 철갑옷의 완성도가 달라진다는 것을 의미하며, 솔리테어의 하얀 달팽이는 철이 부족해서 방어력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케이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극한의 환경이 오히려 최강의 방어구를 만드는 공장이 된 셈입니다.

황산화 세균 공생: 내부 독소 처리와 에너지 생산의 이중 전략

당초 과학자들은 비늘발달팽이의 철갑옷이 포식자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한 방어용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열수 분출공에는 피모링쿠스라는 독침 달팽이가 서식하며, 이 포식자의 독침은 일반 달팽이 껍데기는 손쉽게 뚫지만 비늘발달팽이의 철갑옷은 뚫지 못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2006년 일본 해양 연구 개발 기구의 스즈키 박사 연구팀이 밝혀낸 철갑옷의 진짜 목적은 충격적이었습니다. 철갑옷은 외부의 적이 아니라 내부의 독을 처리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비늘발달팽이의 몸속에는 황산화 세균이 살고 있습니다. 이 세균들은 황화수소를 분해하며 에너지를 만드는 과정에서 독성 부산물을 계속 생성합니다. 이때 비늘발달팽이의 철이 마치 자동차의 촉매 변환기처럼 독성 황화수소를 흡수하고 이를 철 황화물로 바꿔 독성을 무력화시킵니다. 즉 철갑옷은 내부 독소 처리가 주 목적이고, 외부 방어는 덤으로 얻은 보너스였던 것입니다. 이는 진화가 얼마나 정교하고 효율적인 해결책을 만들어내는지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2015년 홍콩 과기대와 일본 해양 연구 개발기구 공동 연구팀이 3D CT로 정밀 스캔한 결과입니다. 비늘발달팽이의 심장 크기는 몸 부피의 무려 4%를 차지했습니다. 인간의 심장이 체중의 0.3%인 것을 생각하면 13배가 넘는 크기입니다. 반면 뇌 기능을 담당하는 기관은 거의 없었고 아주 단순한 신경계만 있을 뿐이었으며, 소화 기관도 거의 퇴화해 있었습니다. 이러한 극단적인 신체 구조의 비밀은 바로 황산화 세균과의 공생 관계에 있습니다.
비늘발달팽이는 먹이를 전혀 먹지 않습니다. 대신 식도샘이라는 거대한 기관에 수십억 마리의 황산화 세균을 키우고 있습니다. 이 세균들은 열수구의 황화수소를 분해해서 달팽이에게 필요한 모든 영양분을 공급합니다. 식물의 광합성과 비슷하지만 햇빛 대신 화학 에너지를 쓰는 화학 합성입니다. 거대한 심장은 이 세균들에게 충분한 산소와 황화수소를 공급하기 위한 것이었고, 뇌와 소화 기관은 세균 공장 공간 확보를 위해 과감히 포기한 것이었습니다. 줄리아 시그워트 박사는 이를 "세균들이 작은 운전대를 잡고 달팽이를 조종하는 것 같다"라고 표현했습니다. 결국 비늘발달팽이는 세균을 위한, 세균에 의한, 세균의 택시였던 셈입니다. 이러한 공생 관계는 극한 환경에서 생명이 살아남기 위해 선택한 가장 효율적인 전략이며, 내부 독소 처리와 에너지 생산이라는 이중 목적을 동시에 달성하는 놀라운 시스템입니다.

멸종위기: 5억 년 생존과 인간의 욕심 사이에서

2020년 비늘발달팽이의 전체 유전자 지도가 완성되면서 또 하나의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비늘을 만드는 유전자가 무려 5억 4천만 년 전 캄브리아기 대폭발 시대부터 존재했다는 것입니다. 캄브리아기는 지구 생명체의 다양성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시기로, 현대 동물의 대부분 문(phylum)이 이 시기에 출현했습니다. 비늘발달팽이는 5억 년 동안 유지되어 온 살아있는 화석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단순히 오래된 종이라는 의미를 넘어, 생명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진화적 혁신 중 하나를 간직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2019년 7월 18일 비늘발달팽이는 IUCN 적색 목록에 멸종 위기종으로 공식 등재되었습니다. 심해 채굴 위협 때문에 멸종 위기종이 된 역사상 첫 번째 생물입니다. 현재까지 전 세계에서 세 곳 남짓에서만 발견되었는데, 이 세 곳을 다 합쳐도 축구장 세 개보다 작은 면적입니다. 열수 분출공에는 구리, 금, 은, 희토류 등 값비싼 광물이 가득한데, 채굴이 시작되면 이 놀라운 생명체는 영원히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비늘발달팽이가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극한 환경에서도 생명은 방법을 찾아 살아남지만, 인간의 무분별한 개발 앞에서는 무력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5억 년을 살아남은 기적의 생명체가 불과 수십 년 만에 멸종할 수 있다는 현실은 우리의 책임을 환기시킵니다. 비늘발달팽이의 철갑옷 제조 기술은 이미 방탄복 개발에 응용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무궁무진한 생체모방 기술의 원천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가능성은 비늘발달팽이가 살아남았을 때만 의미가 있습니다.
알렉스 라일리의 책 <극한 생존>은 비늘발달팽이를 비롯해 물 한 방울 없는 세상에서도 몸을 접어 시간을 멈추는 완보동물, 스스로를 얼렸다가 다시 깨어나는 개구리, 히말라야의 죽음의 고도를 넘나드는 줄 기러기, 빛이 닿지 않는 심해에서 화학 에너지로 삶을 이어가는 관벌레 등 극한 환경에 맞서 살아가는 다양한 동물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이 책은 생존이 단지 버티는 기술이 아니라 자신을 다시 만들어내는 경이로운 변화의 과정임을 보여주며, 작은 생명 하나도 결코 하찮지 않다는 깊은 여운을 남깁니다.
비늘발달팽이는 철갑옷 구조를 통한 내부 독소 처리와 외부 방어, 황산화 세균과의 공생을 통한 에너지 생산, 5억 년을 이어온 유전자 등 진화의 경이로움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생명체입니다. 그러나 현재 심해 채굴로 인해 멸종 위기에 처해 있으며, 우리의 선택이 이 기적 같은 생명의 운명을 결정할 것입니다. 자연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끈질기고 놀랍지만, 동시에 우리의 무관심 앞에서는 얼마나 연약한지를 비늘발달팽이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출처]
과학드림 채널: https://www.youtube.com/watch?v=FEgsst_cl3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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