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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해 300~1,000m 깊이에는 인간보다 훨씬 큰 생명체가 살고 있습니다. 몸통만 2~3m, 촉수까지 합치면 최대 18m에 달하는 대왕오징어입니다. 19세기 전설 속 괴물 크라켄의 실체로 알려진 이 생명체는 2012년에야 비로소 온전한 헤엄치는 모습이 촬영되었습니다. 대왕오징어는 단순히 크기만 거대한 것이 아니라, 심해 환경에 최적화된 독특한 생존 전략과 진화의 산물입니다.

대왕오징어의 빨판 구조와 사냥 전략
대왕오징어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촉수 끝에 다다닥 붙어 있는 빨판입니다. 이 빨판은 단순한 흡착판이 아닙니다. 빨판의 가장자리에는 키틴질로 된 톱니가 둥글게 배열되어 있어, 빨아들이고 파고들고 긁어내는 세 가지 기능이 동시에 작동합니다. 심해 동물들은 대부분 미끈하거나 점액층이 두꺼워서 일반적인 흡착력만으로는 놓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키틴 톱니가 살을 파고들면서 고정하기 때문에, 먹이가 저항할수록 더 깊이 박히며 출혈과 근육 손상을 일으켜 점진적으로 무력화시킵니다.
대왕오징어는 8개의 다리와 2개의 촉수를 가지고 있는데, 촉수만 8~10m에 달합니다. 버스 한 대 길이에 맞먹는 촉수를 멀리서 한 번에 뻗어 확실히 붙잡는 전략을 사용합니다. 이는 먹이를 만날 기회가 극히 적은 심해 환경에서 '한 판에 끝내는 포획 전략'입니다. 빨판은 촉각 센서 역할도 하여 먹이의 크기, 활동성, 저항 정도를 실시간으로 감지하면서 최적의 포획 전략을 구사합니다. 먹이를 끌어당긴 후에는 몸통 중앙에 있는 앵무새처럼 단단한 키틴 부리로 뜯어먹습니다.
향유고래 표면에서 발견되는 하얀 상처 자국은 대왕오징어와의 치열한 사투를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서대문자연사박물관에 전시된 향유고래 모형에도 이러한 상처가 표현되어 있습니다. 대왕오징어의 빨판 구조는 단순한 포획 도구를 넘어, 심해라는 극한 환경에서 생존하기 위한 정교한 생체 공학적 설계의 결과물입니다.
심해 생물의 거대화 이유와 생존 전략
대왕오징어가 이토록 거대해진 이유는 심해 환경의 특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심해는 빛이 없고 먹이가 극도로 적으며, 만날 수 있는 생물도 거의 없습니다. 대신 환경 변화는 매우 느리고 안정적입니다. 이러한 환경에서 심해 생물들은 '먹을 때 왕창 먹자'는 생존 전략을 채택했고, 이를 위해서는 큰 몸집이 유리했습니다.
몸집이 커지면 부피 대비 표면적의 비율이 줄어듭니다. 부피는 세제곱으로 증가하지만 표면적은 제곱으로만 증가하기 때문에, 열 손실이 줄어들고 에너지 효율이 증가합니다. 심해는 냉장고처럼 차가운 곳이므로, 큰 몸은 배터리처럼 오래 버틸 수 있습니다. 작은 몸은 체온을 빠르게 잃어 에너지를 소모하지만, 큰 몸은 체온을 오래 유지하며 에너지를 절약할 수 있습니다.
또한 큰 몸집은 먹이 포획에도 유리합니다. 먹이를 만날 기회가 적은 심해에서는 만났을 때 무조건 잡아야 합니다. 대왕오징어의 긴 촉수는 멀리서도 공격할 수 있어 먹이가 도망가기 전에 포획할 수 있습니다. 포식자 회피 측면에서도 큰 몸은 이점이 있습니다. 향유고래 같은 대형 포식자에게 작은 오징어는 간식거리지만, 대왕오징어는 싸워야 하는 상대입니다. 큰 몸집은 포식자에게 먹기 불편한 존재로 인식되어 생존율을 높입니다.
수명 측면에서도 큰 몸은 유리합니다. 일반적으로 큰 동물일수록 수명이 길며, 이는 번식 기회가 많아진다는 의미입니다. 대왕오징어는 작은 오징어보다 훨씬 오래 살아 번식 성공률이 높습니다. 심해 거대화는 체온 유지, 먹이 포획, 포식자 회피, 번식 성공이라는 복합적 이점이 결합된 진화 전략입니다. 대왕오징어의 거대한 눈(지름 25~30cm)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농구공만 한 이 눈은 사냥용이 아니라 향유고래의 거대한 그림자를 먼저 발견해 도망치기 위한 회피용으로 특화되어 있습니다.
두족류의 진화 과정과 대왕갑오징어
대왕오징어의 진화를 이해하려면 두족류의 전체 진화 과정을 살펴봐야 합니다. 오징어와 갑오징어의 공통 조상은 중생대에 살았던 벨렘나이트류와 가까운 원시 코레오이드 두족류입니다. 옛날 두족류들은 커다란 소라 같은 껍질을 가지고 있었지만, 껍질은 방향 전환을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고생대 말에서 중생대 초기(2억 7천만~2억 4천만 년 전), 페름기 대멸종으로 바다 생태계가 리셋되면서 껍질을 몸 안쪽으로 넣은 새로운 두족류가 등장했습니다.
이 공통 조상에서 먼저 문어가 갈라져 나갔습니다. 문어는 정착 생활을 선택하며 촉수 2개를 포기하고 8개의 다리만 남겼습니다. 문어의 팔 하나하나는 독립 신경망을 가진 분산형 뇌 구조로, 전체 신경 세포의 절반이 팔에 있어 CPU가 8개인 컴퓨터와 같습니다. 문어는 촉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길을 택했습니다.
문어가 갈라진 후 남은 그룹에서 오징어와 갑오징어가 분화했습니다. 오징어는 내부 껍질을 가늘게 축소해 속도를 높였고, 갑오징어는 껍질을 넓게 유지해 부력을 높였습니다. 오징어는 개방된 바다에서 빠른 속도와 추격을 선택했고, 중앙 집중형 뇌로 순간 반응과 시각 판단에 특화되었습니다.
흥미롭게도 대왕오징어보다 무거운 대왕갑오징어(메소니코테우티스 해밀토니, 남극하트지느러미오징어)도 존재합니다. 대왕갑오징어는 길이가 6~7m로 대왕오징어(10~13m) 보다 짧지만, 무게는 400~500kg으로 두 배 이상 무겁습니다. 메소니코테우티스라는 학명은 '가운데 갈고리를 가진'이라는 뜻으로, 촉수는 짧지만 팔 전체에 회전 가능한 날카로운 갈고리가 있어 근접전에 특화되어 있습니다. 대왕오징어가 원거리 사냥꾼이라면, 대왕갑오징어는 근접 압살형 레슬러입니다.
대왕갑오징어가 남극에만 서식하는 이유는 적응의 결과가 아니라 생존의 결과입니다. 원래는 전 세계에 분포했지만, 기후 변화와 경쟁 증가로 빠른 포식자들이 등장하면서 느리고 무거운 대왕갑오징어는 경쟁자가 적은 남극에서만 살아남았습니다. 남극의 극저온, 적은 먹이, 적은 대형 포식자, 인간 활동 부재라는 환경이 강하지만 느린 대왕갑오징어에게 적합했던 것입니다.
진화는 거북이가 단단한 껍질로 생존한 것처럼 정해진 방향이 없습니다. 오징어는 정반대로 껍질을 버리고 유연성과 속도로 생존했습니다. 거북이는 얕은 바다의 장애물 많은 환경에서 버티는 전략을, 오징어는 개방된 바다에서 속도와 회피 전략을 선택했습니다. 대왕오징어와 대왕갑오징어는 각각 다른 환경과 전략으로 심해의 최상위 포식자가 된 진화의 다양성을 보여줍니다.
대왕오징어에 대한 공포는 16~18세기 북유럽 선원들이 전한 크라켄 전설에서 비롯되었지만, 실제로 크라켄이 배를 침몰시킨 목격자는 없습니다. 대왕오징어는 심해에 살아 다이버와 마주칠 확률이 제로이며, 다이버를 공격했다는 보고는 대부분 얕은 바다에 사는 훔볼트오징어에 의한 것입니다. 대왕오징어는 사람을 먹도록 진화하지 않았으며, 백상아리를 잡아먹는다는 루머도 서식지가 다르기 때문에 과학적 근거가 없습니다.
대왕오징어는 심해라는 극한 환경에서 거대화, 특수화된 포획 기관, 회피 전략이 결합된 진화의 걸작입니다. 키틴질 톱니가 박힌 빨판은 미끈한 심해 생물을 확실히 포획하는 생체 공학적 설계이며, 농구공만 한 눈은 포식자를 조기 발견하는 생존 도구입니다. 심해 거대화는 열 손실 최소화, 먹이 포획 극대화, 포식자 회피, 번식 성공이라는 복합적 이점의 산물입니다. 두족류의 진화 과정에서 문어는 촉각과 분산형 뇌를, 오징어는 속도와 중앙 집중형 뇌를 선택했으며, 대왕오징어와 대왕갑오징어는 각각 원거리와 근거리 전략으로 심해 생태계의 정점에 섰습니다. 이들은 생존을 위해 서로 다른 길을 선택한 진화의 다양성과 적응의 놀라운 사례입니다.
[출처]
영상 제목/채널명: https://www.youtube.com/watch?v=t83wxUU84zc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