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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캐나다 색스 하버에서 발견된 한 마리의 곰은 생물학계에 큰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북극곰의 흰 털을 가졌지만 회색곰의 얼굴 특징을 지닌 이 곰은 DNA 분석 결과 두 종의 잡종으로 밝혀졌습니다. 이후 2010년부터 2014년 사이 여섯 마리 이상의 잡종 곰이 연이어 발견되면서, 과학자들은 북극에서 벌어지고 있는 생물학적 변화에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글에서는 그롤라 베어의 등장 배경과 그것이 시사하는 진화적 의미를 심층적으로 분석합니다.

그롤라 베어
그롤라 베어

기후변화가 만든 새로운 만남의 장

2006년 사냥꾼 짐 마텔이 캐나다 북쪽 색스 하버에서 사냥한 곰은 캐나다 야생동물 보호 부문을 곤란에 빠뜨렸습니다. 긴 발톱과 혹처럼 굽은 등, 짧은 주둥이와 솟은 어깨는 회색곰의 특징이었지만 털 색깔은 북극곰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캐나다에서는 원주민 동행 하에 진행되는 북극곰 사냥은 합법이었으나 회색곰 사냥은 불법이었기에, 짐 마텔은 120만 원의 벌금과 최대 1년의 징역형 가능성에 직면했습니다. DNA 분석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이 곰은 수컷 회색곰과 암컷 북극곰 사이에서 태어난 잡종이었던 것입니다.

야생에서 잡종 곰이 발견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지만, 2년 전 독일의 한 동물원에서는 이미 북극곰과 회색곰의 잡종이 태어난 사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동물원과 달리 야생에서의 발견은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닙니다. 이는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2010년, 2012년, 2014년 사이 무려 여섯 마리의 잡종 곰이 추가로 발견되면서 이것이 지속적인 현상임이 드러났습니다.

2014년 야생동물 탐험가 베이스와 케이 씨는 알래스카로 탐사를 떠났고, 우여곡절 끝에 잡종 곰으로 추정되는 개체를 카메라에 담는 데 성공했습니다. 사진 속 곰은 북극곰처럼 흰 털을 가졌지만 둥근 얼굴과 쫑긋 솟은 귀, 짧은 코는 영락없는 회색곰의 모습이었습니다. 캘리포니아 대학교의 진화 생물학자 배스 샤피로 교수는 이 사진을 보고 "북극곰의 머리에 회색곰의 몸을 가진 곰"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과학자들은 잡종 곰의 등장 원인으로 지구 온난화와 숲의 난개발을 지목했습니다. 지구가 점차 더워지고 북극의 빙하들이 녹자 서식지와 사냥터를 잃은 북극곰들은 어쩔 수 없이 아래쪽으로 내려오게 됐습니다. 마찬가지로 회색곰 또한 광산과 도로 건설 등으로 숲이 개발되면서 기존 서식지가 축소됐는데, 다행히 북극해 지역이 따뜻해진 덕분에 이들은 자연스레 위쪽으로 서식지를 옮겨갈 수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 둘이 마주치는 일이 많아진 것입니다. 실제로 알래스카 북부 이누이트 족이 고래를 사냥한 후 버린 뼈 더미에서 예전에는 북극곰만 목격됐지만, 최근에는 회색곰이 발견되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몬태나 대학의 크리스 셔비 교수는 이런 고래 사체들이 만남의 광장 역할을 하게 됐고, 이곳에서 둘의 교배가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고 언급했습니다. 지구 온난화로 인한 생물학적 장벽의 붕괴는 이렇게 가시적인 결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잡종의 번식력과 생존 가능성

일반적으로 잡종은 생식 능력이 없어 자연에서 도태되기 쉽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말과 당나귀 사이에서 태어난 노새입니다. 그렇다면 왜 과학자들은 그롤라 베어가 성공적으로 번식을 이어나갈 수 있다고 보는 걸까요? 답은 염색체 개수의 차이에 있습니다.

말과 당나귀는 약 200만 년 전에 분기돼 각자의 길을 걸어오면서 그 과정에서 염색체가 재배열됐습니다. 그 결과 말은 염색체가 64개, 당나귀는 62개가 됐습니다. 이 둘 사이에서 태어난 노새는 말에서 32개, 당나귀로부터 30개를 받게 되니 총 염색체 숫자는 63개가 됩니다. 결국 상동 염색체의 짝이 맞지 않아 생식을 위한 감수 분열을 일으키지 못하므로 후손을 낳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롤라 베어라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회색곰과 북극곰은 약 15만 년 전에 분기됐기 때문에 유전적으로 유사할뿐더러 염색체 개수도 74개로 서로 같습니다. 따라서 이들로부터 태어난 잡종 곰도 74개 염색체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성공적인 번식이 가능합니다. 이는 노새와는 전혀 다른 생물학적 조건을 의미합니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그롤라 베어의 생존 가능성입니다. 2021년 밴더빌트 대학의 생물학자 라리사 박사는 머지않은 미래에 이 잡종 곰이 북극곰을 대체할지도 모른다고 주장했습니다. 회색곰은 사슴이나 다람쥐, 연어뿐만 아니라 때에 따라서는 곤충과 식물의 뿌리, 풀, 음식물 쓰레기까지 먹는 잡식성 동물입니다. 그롤라 베어 역시 두개골 형태가 이들과 비슷하기 때문에 식성도 닮았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만약 그렇다면 북극의 해빙이 점차 녹아가는 지금 이 시점에서 바다표범이나 물범 사냥에만 익숙한 북극곰보다 잡식성인 그롤라 베어의 생존 확률이 더 높아질 수 있습니다. 점차 따뜻해지는 기후는 북극곰을 밀어내고 이들의 빈자리는 잡종 곰으로 대체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단순히 새로운 종의 등장이 아니라, 변화하는 환경에 더 잘 적응한 형질이 선택되는 자연선택의 과정을 실시간으로 목격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롤라 베어의 행동과 형질들이 변화하는 환경에 적합하기만 하다면, 이들이 북극곰의 자리를 위협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입니다.

진화의 증거로서의 잡종 현상

그롤라 베어와 유사한 사례로 일각고래와 벨루가의 잡종인 나루가를 들 수 있습니다. 1990년대 매드 피터 박사는 한 이누이트 사냥꾼의 창고에서 생전 처음 보는 고래 두개골을 발견했습니다. 두개골 형태가 벨루가와 일각고래 양쪽과 비슷했고, 벨루가처럼 짧은 이빨을 여러 개 가지고 있으면서도 뒤틀리며 앞으로 뻗어 나온 형태가 꼭 일각고래의 것과 닮았습니다. 피터 박사는 막연하게 이들이 벨루가와 일각고래의 교잡종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30년이 지나서야 DNA를 세밀하게 분석하는 연구를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결과는 그의 추측대로였습니다.

현재 많은 과학자들은 잡종 곰과 마찬가지로 북극해의 빙하가 녹기 시작하면서 일각고래와 벨루가의 서식지가 상당 부분 겹치게 됐고, 그로 인한 교잡으로 나루가가 등장했다고 주장합니다. 일각고래와 벨루가도 염색체 개수가 같아서 나루가 역시 원활한 번식이 가능할 것으로 보입니다. 2018년 그린란드 해양 포유류 연구단체는 실제로 어린 일각고래 수컷이 벨루가 무리에 들어가 함께 어울리며 수영하는 모습을 관찰하는 데 성공했고, 이로써 나루가의 존재가 거의 확실시됐습니다.

현재 나루가는 20마리 정도 관찰됐다고 보고되고 있습니다. 코펜하겐 대학교 글로브 연구소 엘린 로렌젠 박사는 이들의 이빨에서 추출한 탄소 동위원소로 분석한 결과 나루가가 벨루가보다는 일각고래와 상당히 유사하다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그녀는 이를 통해 나루가의 주 식단이 해저에 사는 조개 같은 무척추동물일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먹이를 흡입하는 나루가는 물고기를 사냥하는 벨루가와는 전혀 다른 전략으로 환경에 적응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기후변화로 인한 잡종의 등장은 야생에게는 비극이지만, 한편으로 새로운 종의 탄생과 진화 과정을 엿볼 수 있는 천재일우의 좋은 기회를 제공합니다. 잡종은 진화라는 틀 안에서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심지어 우리 인류마저도 잡종의 후예입니다. 우리에게는 네안데르탈인의 유전자, 그리고 데니소바인의 유전자가 있습니다. 이는 수십만 년 전 어딘가 비슷하면서도 다른 인류의 선조들 사이에서 잡종이 탄생했고, 이 잡종은 또 다른 종들과 유전자를 교류하며 점진적으로 변화해 나갔으며, 이러한 잡종에서 비롯된 것이 바로 지금의 우리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어쩌면 진화는 끝없는 잡종의 역사일지도 모릅니다.

기후변화는 생물학적 장벽을 무너뜨리며 새로운 종의 탄생을 촉진하고 있습니다. 그롤라 베어와 나루가는 단순한 잡종이 아니라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는 진화의 살아있는 증거입니다. 이들이 조상 종을 대체할 우점종이 될지는 아직 미지수이지만, 잡종의 성공적인 번식 가능성과 환경 적응력은 우리에게 진화가 현재진행형임을 일깨워줍니다. 인류 역시 과거 잡종에서 비롯됐다는 점을 고려할 때, 우리는 이러한 현상을 괴물이 아닌 자연의 창조적 응답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출처]
기후변화와 잡종의 진화 / 과학드림: https://www.youtube.com/watch?v=5Y7J1jA_d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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